
사기 열전 1
사마천사기(史記) 중 정수로 평가되는 중국의 고대 인물들을 다룬 전기
백이 열전을 첫째편으로 시작해 노자 한비 열전, 오자서 열전 등 총 70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기』를 집필한 목적과 의도를 자세히 밝히고 있는 제130권 태사공자서로 끝을 맺고 있다. 사마천은 백이 열전에서 주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죽은 백이·숙제의 비통한 운명을 논하며 부조리한 세상사에 대한 울분을 토로하고, 아울러 궁형(宮刑)을 당한 자신의 억울한 처지와 유사하다는 데서 비롯된 동류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관포지교(管鮑之交)’나 ‘토사구팽(兎死狗烹)’과 같은 고사성어로도 널리 알려진 이 역사서는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더욱 빛을 발하며 동서양의 고전으로 손꼽히고 있다.
「백이 열전(伯夷列傳)」 말세에는 사람들이 모두 이익을 다투었지만, 오직 백이와 숙제만은 인의를 추구하여 나라를 양보하고 굶어 죽으니 천하가 그들을 칭송했다. 「관 · 안 열전(管晏列傳)」 안자(晏子: 안영)는 검소하고 이오(夷吾: 관중)는 사치했다. 제나라 환공은 관중을 등용해서 패자가 되었고, 경공(景公)은 안자를 등용해서 나라를 잘 다스렸다. 「노자 · 한비 열전」 노자는 무위(無爲)로써 스스로 자연스럽게 변하고 청정(淸淨)으로써 스스로 바르게 하였다. 한비는 사물의 이치를 헤아리고 형세와 이치에 따랐다. 「사마양저 열전」 고대 제왕 때부터 ‘사마법(司馬法)’이 있었는데, 양저가 이것을 부연하여 명료하게 했다. 「손자 · 오기 열전」 신(信) · 염(廉) · 인(仁) · 용(勇)이 아니고서는 병법을 전하거나 검술을 논할 수 없다. 병법은 도덕과 부합해야 안으로는 몸을 다스리고, 밖으로는 변화에 순응할 수 있기에 군자는 병법을 도덕에 비견시키는 것이다. 「오자서 열전」 건(建: 초 평왕의 태자)이 참소를 당하자, 그 화가 태부 오사에게까지 미쳤다. 오상은 아버지를 구하려 했고, 오운(오자서)은 오나라로 달아났다. 「중니제자 열전(仲尼弟子列傅)」 공자는 문덕을 서술하고, 제자들은 학업을 일으켜 모두 제후들의 사부가 되었다. 인을 숭상하고 의를 권장했다. 「상군 열전(商君列傳)」 상앙은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가서 치국의 법술을 밝혀서 효공을 패자로 만들었으니, 진나라는 후세까지 그 법을 따랐다. 「소진 열전」 천하가 경계한 것은 진(秦)나라의 연횡책과 그칠 줄 모르는 욕심이었다. 그러나 소진은 제후국들을 수호하고 합종을 맹약함으로써 강대한 진나라를 억제하였다. 「장의 열전」 6국은 이미 합종의 맹약을 하여 화친했으나, 장의는 자신의 주장(연횡설)을 밝힘으로써 합종한 제후들을 다시금 흩어지게 했다. 「저리자 · 감무 열전」 진나라가 관동을 차지하여 제후들의 패자가 된 것은 저리자와 감무의 책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후 열전」 황하와 화산을 장악하고 대량을 포위하여 제후들로 하여금 순순히 진나라를 섬기게 한 것은 위염의 공이다. 「백기 · 왕전 열전」 진나라가 남쪽으로는 초나라의 언과 영을 빼앗고, 북쪽으로는 조나라를 장평에서 깨뜨리고 마침내 한단을 포위한 것은 무안군 백기의 지휘에 의한 것이고 또 형을 무찌르고 조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왕전의 계책이다. 「맹자 · 순경 열전」 맹자는 유가와 묵가의 유문(遺文)을 섭렵하고, 예의의 기강을 밝혔으며, 양혜왕의 이익 본위의 마음가짐을 근절시키고, 순경은 지난날의 흥망을 열거했다. 「맹상군 열전」 제나라의 맹상군은 빈객을 좋아하고 유사를 기꺼이 맞았으므로 천하의 선비들은 설 땅으로 모여들었다. 그는 제나라를 위하여 초나라와 위나라의 침략을 막았다. 「평원군 · 우경 열전」 조나라의 평원군은 한나라 상당의 태수 풍정과 권모를 놓고 서로 다투고, 초나라로 가서는 한단의 포위를 풀고 조나라의 군주로 하여금 다시 제후들 가운데 군림하게 하였다. 「위공자 열전」 부귀한 신분으로서 가난한 선비에게 몸을 낮추고, 현능한 선비로서 불초한 사람에게 굽히는 일은 오직 신릉군만이 할 수 있었다.
백이 열전을 첫째편으로 시작해 노자 한비 열전, 오자서 열전 등 총 70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기』를 집필한 목적과 의도를 자세히 밝히고 있는 제130권 태사공자서로 끝을 맺고 있다. 사마천은 백이 열전에서 주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죽은 백이·숙제의 비통한 운명을 논하며 부조리한 세상사에 대한 울분을 토로하고, 아울러 궁형(宮刑)을 당한 자신의 억울한 처지와 유사하다는 데서 비롯된 동류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관포지교(管鮑之交)’나 ‘토사구팽(兎死狗烹)’과 같은 고사성어로도 널리 알려진 이 역사서는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더욱 빛을 발하며 동서양의 고전으로 손꼽히고 있다.
「백이 열전(伯夷列傳)」 말세에는 사람들이 모두 이익을 다투었지만, 오직 백이와 숙제만은 인의를 추구하여 나라를 양보하고 굶어 죽으니 천하가 그들을 칭송했다. 「관 · 안 열전(管晏列傳)」 안자(晏子: 안영)는 검소하고 이오(夷吾: 관중)는 사치했다. 제나라 환공은 관중을 등용해서 패자가 되었고, 경공(景公)은 안자를 등용해서 나라를 잘 다스렸다. 「노자 · 한비 열전」 노자는 무위(無爲)로써 스스로 자연스럽게 변하고 청정(淸淨)으로써 스스로 바르게 하였다. 한비는 사물의 이치를 헤아리고 형세와 이치에 따랐다. 「사마양저 열전」 고대 제왕 때부터 ‘사마법(司馬法)’이 있었는데, 양저가 이것을 부연하여 명료하게 했다. 「손자 · 오기 열전」 신(信) · 염(廉) · 인(仁) · 용(勇)이 아니고서는 병법을 전하거나 검술을 논할 수 없다. 병법은 도덕과 부합해야 안으로는 몸을 다스리고, 밖으로는 변화에 순응할 수 있기에 군자는 병법을 도덕에 비견시키는 것이다. 「오자서 열전」 건(建: 초 평왕의 태자)이 참소를 당하자, 그 화가 태부 오사에게까지 미쳤다. 오상은 아버지를 구하려 했고, 오운(오자서)은 오나라로 달아났다. 「중니제자 열전(仲尼弟子列傅)」 공자는 문덕을 서술하고, 제자들은 학업을 일으켜 모두 제후들의 사부가 되었다. 인을 숭상하고 의를 권장했다. 「상군 열전(商君列傳)」 상앙은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가서 치국의 법술을 밝혀서 효공을 패자로 만들었으니, 진나라는 후세까지 그 법을 따랐다. 「소진 열전」 천하가 경계한 것은 진(秦)나라의 연횡책과 그칠 줄 모르는 욕심이었다. 그러나 소진은 제후국들을 수호하고 합종을 맹약함으로써 강대한 진나라를 억제하였다. 「장의 열전」 6국은 이미 합종의 맹약을 하여 화친했으나, 장의는 자신의 주장(연횡설)을 밝힘으로써 합종한 제후들을 다시금 흩어지게 했다. 「저리자 · 감무 열전」 진나라가 관동을 차지하여 제후들의 패자가 된 것은 저리자와 감무의 책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후 열전」 황하와 화산을 장악하고 대량을 포위하여 제후들로 하여금 순순히 진나라를 섬기게 한 것은 위염의 공이다. 「백기 · 왕전 열전」 진나라가 남쪽으로는 초나라의 언과 영을 빼앗고, 북쪽으로는 조나라를 장평에서 깨뜨리고 마침내 한단을 포위한 것은 무안군 백기의 지휘에 의한 것이고 또 형을 무찌르고 조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왕전의 계책이다. 「맹자 · 순경 열전」 맹자는 유가와 묵가의 유문(遺文)을 섭렵하고, 예의의 기강을 밝혔으며, 양혜왕의 이익 본위의 마음가짐을 근절시키고, 순경은 지난날의 흥망을 열거했다. 「맹상군 열전」 제나라의 맹상군은 빈객을 좋아하고 유사를 기꺼이 맞았으므로 천하의 선비들은 설 땅으로 모여들었다. 그는 제나라를 위하여 초나라와 위나라의 침략을 막았다. 「평원군 · 우경 열전」 조나라의 평원군은 한나라 상당의 태수 풍정과 권모를 놓고 서로 다투고, 초나라로 가서는 한단의 포위를 풀고 조나라의 군주로 하여금 다시 제후들 가운데 군림하게 하였다. 「위공자 열전」 부귀한 신분으로서 가난한 선비에게 몸을 낮추고, 현능한 선비로서 불초한 사람에게 굽히는 일은 오직 신릉군만이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