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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열전 5 커버
사기 열전 5
사마천
사기(史記) 중 정수로 평가되는 중국의 고대 인물들을 다룬 전기
백이 열전을 첫째편으로 시작해 노자 한비 열전, 오자서 열전 등 총 70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기』를 집필한 목적과 의도를 자세히 밝히고 있는 제130권 태사공자서로 끝을 맺고 있다. 사마천은 백이 열전에서 주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죽은 백이·숙제의 비통한 운명을 논하며 부조리한 세상사에 대한 울분을 토로하고, 아울러 궁형(宮刑)을 당한 자신의 억울한 처지와 유사하다는 데서 비롯된 동류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관포지교(管鮑之交)’나 ‘토사구팽(兎死狗烹)’과 같은 고사성어로도 널리 알려진 이 역사서는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더욱 빛을 발하며 동서양의 고전으로 손꼽히고 있다.

「순리 열전」 법을 받들고 이치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관리는 공로를 자랑하지 않고 재능을 뽐내지 않는다. 백성들도 그들을 칭찬하는 일이 없지만, 그러나 그들은 또한 과오를 범하는 일도 하지 않는다. 「급 · 정 열전」 의관을 단정히 하고 조정에 서면 여러 신하들 가운데 감히 허튼 소리를 하는 자가 없었으니, 장유의 강직하고 엄중함이 이러하였다. 즐겨 인물을 추천하여 장자로 불렸으니, 장에게는 그러한 기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림 열전」 공자가 죽은 뒤로부터 경사(京師)에서도 학교의 가르침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로지 건원 원수 연간에는 학문이 찬란하게 빛났다. 「혹리 열전」 백성들은 근본을 저버리고 교묘함을 일삼아, 규칙을 어기고 법을 우롱하니, 착한 사람은 그들을 교화시킬 수 없었다. 오직 엄격하고 혹독함만이 이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대원 열전」 한나라는 이미 사자를 대하(大夏)까지 오가도록 하여 서쪽 끝 멀리 있는 오랑캐는 안쪽으로 목을 늘이고 중국을 보기를 원했다. 「유협 열전」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하고 빈곤한 사람을 구제함은 인의 측면에서 찬탄 받을 처사가 아니겠는가? 신의를 잃지 않고 언약을 저버리지 않음은 의로운 자들에게서 취할 것들이다. 「영행 열전」 군주를 섬기며 능히 군주의 이목을 즐겁게 하고, 군주의 얼굴빛을 펴게 하여 총애를 받았던 것은 그들이 미색뿐 아니라 재능에도 각기 뛰어난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골계 열전」 세속에 흐르지 않았고 권력과 이익을 다투지 않았으며, 위아래도 막히지 않고, 사람들도 그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아 그 도가 받아들여졌다. 「일자 열전」 제 · 초 · 진 · 조의 점복가들은 각기 풍속에 따라 점을 치는 방법이 달라 그 대체적인 뜻을 살펴보고자 한다. 「귀책 열전」 하 · 은 · 주 3대는 귀갑으로 점치는 방법이 달랐고, 사방의 오랑캐들 역시 다른 방법으로 점을 쳤다. 그러나 이들 모두 이로써 길흉을 판단했다. 대충 그 요지를 살폈다. 「화식 열전」 무위무관의 신분으로 정치를 해치지도 않고 백성들의 생활에 방해가 되지도 않으면서 때에 맞춰 팔고 사서 재산을 늘리는 것은 화식의 도다. 지혜로운 자도 이들에게서 취할 바가 있었다. 「태사공 자서」 우리 한나라는 오제(五帝)의 뒤를 잇고, 삼대(三代)의 중단된 위업을 계승하고 있다. 주나라의 도가 실추된 후 진나라는 고문(古文)을 없애고 『시(詩)』와 『서』를 불태웠다. 그래서 조정이나 왕실 도서관의 석실(石室) 금궤 등에 보관했던 옥판(玉版)의 도적이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한나라가 일어난 뒤에 소하가 율령을 정리하고, 한신이 군법을 밝혔으며, 장창이 율력과 도량형을 개정하고, 숙손통이 예의를 제정했다. 그리하여 인품과 학식을 겸비한 학자들이 점점 등용되었으며, 『시』와 『서』도 자주 세상에 나왔다. 조삼이 갑공을 추천한 이래로 황노의 도를 강론하였고, 가의와 조조는 신불해와 상앙의 법가 학술을 밝히고 공손홍은 유학을 가지고 세상에 나왔다. 이리하여 한나라가 일어난 이래 백 년 동안 천하에 있던 유문과 고문서들이 태사공의 손에 모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출간일

전자책 : 2024-10-25

파일 형식

ePub(17.84 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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