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하라지 슈리푼자 통속의 본성을 말하다
무각끝내는 변
오직 존재하는 그 자체가 신을 드러내는 것임을 선언하는 슈리푼자님에게 저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참나에 대한 관심이 없어도 별다른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에 붙들리면 삶이 고달퍼집니다. 마음이란 높은 곳을 쳐다보도록 채찍질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음이란 본래 실재하는 무엇이 아닌 허깨비와 같은 물건입니다. 왜냐하면 물에 젓가락을 집어넣으면 휘어져 보이거나, 입체 안경을 쓰고 영화를 보면 화살이 내게 날아오는 장면에서는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연출된 영화를 보면서도 희로애락을 느낀다는 것은 마음이란 실재가 아니라 보이고 들려오는 것에 기반되어 나타난 허상임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만일 마음이 실재하는 무엇이라면 이미 거짓임을 알기 때문에 맞은 편 기차가 지나쳐도 뒤로 달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눈을 감지 않으면 기차가 긴 만큼 뒤로 달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가에서는 진공묘유 무생법인(眞空妙有 無生法忍)이라고 합니다. 즉 텅빈 진공에는 묘한 것(앎)이 있으므로 인간은 본래 태어난 바 없으며 강물에 달이 비치듯 법의 도장이 찍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각이 흘러다니면 진공이 되지 못하지만 우리에게는 마음 이외에는 따로 믿을 것이 없기에 허망한 마음을 위주로 살다 보니, 주변 여건이 힘든 상황이면 도무지 헤쳐 나갈 수 없는 상실감과 무력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한 마음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마음이 생겨난 바탕이 존재함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자리는 본래 움직임이 없는 부동이며, 따라서 굳건한 바위처럼 바람에 흔들림 없는 삶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란 본래 있는 바가 아니므로 마음 하나 돌이키면 지옥과 극락이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모든 것의 주범인 줄 알아차린 인간은 마음과 싸우고 투쟁하면서 참마음을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마음의 바탕인 본성과 떨어진 적 없는데도 마음의 손바닥에 희롱당한 채 살았기에 마음으로 마음을 항복받고자 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마음을 강화시키기만 할 뿐 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마음과 싸우지 않는 것이 마음의 필요가 없어지므로 마음을 항복받는 최상의 길인지도 모릅니다.
깨달음에 관한 무수한 책과 설명이 난무하지만 과연 그로 인해 우리가 도움을 얻을 수 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이론으로 인한 이해는 결국 마음의 테두리에서만 움직이는 때문입니다.
우리는 음식을 먹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으며 촉감을 느끼면 가장 먼저 움직이는 것이 참나인 본성입니다. 마음의 뿌리를 제거하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지만, 마음이란 사물을 반연하여 생겨난 그림자와 같은 허상이라면 뿌리가 어디 있으며, 또한 어떻게 해야 마음의 뿌리를 제거하는지 알지 못하면 공허한 논리일 뿐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들 육신에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곧 본성입니다. 그렇기에 머리를 손으로 만지면 손도 알고 머리도 아는 것입니다.
만일 마음이 주체가 되어 안다면 마음이 머리로 가면 손은 몰라야 하고, 마음이 손으로 가면 머리는 몰라야 하지만 즉각적으로 양쪽에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마음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본성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본성이 육신을 떠나면 그 즉시 부패 되는 고깃덩어리일 뿐이며 육신으로 일군 마음도 흔적없이 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요한 곳에 단정히 앉아 본래 앎이 온 세상에 두루하여 일체 모든 것을 생겨나게 한 것이니, 만상은 모두 본체가 같아 평등한 것임을 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래 앎을 회복하는 모든 수행이란 실제로는 둘이 있는 게 아니지만, 방편과 단계는 그 수가 한없이 많은 것입니다. 그중에서 수행의 종류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면 삼마지, 삼마발제, 선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의 삼마지란 삼매로써 산만한 마음을 가라앉혀 고요하고 적멸한 상태를 이루는 것입니다. 마치 흐린 물을 고요하게 두면 흙 앙금이 가라앉아 맑은 물이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망념이 맑아진 까닭에 본래 앎만이 실재하며 허공꽃처럼 생겨난
만상에 마음이 번거롭게 요동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로부터 고요한 지혜가 생겨나 번뇌가 영원히 소멸하므로 내면의 적멸함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것이 마음을 고요하게 집중함으로서 산만함을 멈추는 삼매를 얻는 수행에 해당될 것입니다.
두 번째 삼마발제의 수행이란 몸과 마음이 모두 실재하는 바가 없는 허공꽃과 같은 데도 본래 앎을 좇아 허망하게 생겨난 것임을 깨닫고, 변화하는 것은 모두 온갖 환의 무리임을 관하는 것입니다.
환으로써 천태만상이 일어났음을 아는 까닭에 눈을 눌러 곁엣달이 나타난 것을 가리켜 있음도 아니고 그렇다고 없음도 아니므로, 있음과 없음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몸과 마음이 가볍고 평안함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 닦는 길로 들어선 사람은 세상이 환법인 줄 아는 까닭에 무아도 아니고 유아도 아닌 수행을 일으켜, 있음과 없음의 양변을 멀리 떠나는 그것이, 생사의 꿈속을 벗어난 열반임을 알아 점차 증진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의 선나의 수행이란 환인 것을 관하는 그것은 환과 같지 않으나, 환과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바도 모두가 환인 까닭에 환의 모습을 영원히 여의게 됩니다.
즉 환인 것을 관찰함은 지켜보는 본래 앎의 성품이므로 환과 같지 않은 까닭이며, 환과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있고 없음과, 같고 다름을 구분하여 생각의 모양을 짓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 전부가 환인 까닭입니다.
이와 같이 수행함으로써 환의 모습을 영원히 여의게 되는 것이며, 마치 맑은 물과 흐린 물이 따로 있는 것 아니며 흐린 물을 고요히 두면 흙 앙금이 가라앉아 맑은 물이 나타날 때, 흙 앙금을 버리면 아무리 흔들어도 맑은 물은 더 이상 흐려지질 않습니다.
이처럼 흙 앙금을 버리는 것이 마음을 끝없이 내려놓는 것이며, 내려놓았다는 생각까지 내려놓으면서 더 내려놓을 것이 없는 지경까지 이르면, 더 이상 좋고 나쁜 경계를 따라 흔들리는 마음이 나타나지 않는 경계가 마음을 쉰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앎이 주인공인 본성의 존재임을 알면 허망하게 생겨난 마음에 의한 허깨비 장난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그것을 인간의 궁극적인 완성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과거생에서도 지금과 똑같이 나를 주장하며 살았지만 흔적도 없으며 미래생에서도 마찬가지로 현생에서 그토록 주장하던 나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잠시도 허공을 숨 쉬지 못하면 즉시 허공으로 돌아가는 허망한 육신을 움켜쥐고, 그런데도 무엇을 그토록 붙잡으려 하고 인정받고자 애쓰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며… 마칩니다.
오직 존재하는 그 자체가 신을 드러내는 것임을 선언하는 슈리푼자님에게 저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참나에 대한 관심이 없어도 별다른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에 붙들리면 삶이 고달퍼집니다. 마음이란 높은 곳을 쳐다보도록 채찍질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음이란 본래 실재하는 무엇이 아닌 허깨비와 같은 물건입니다. 왜냐하면 물에 젓가락을 집어넣으면 휘어져 보이거나, 입체 안경을 쓰고 영화를 보면 화살이 내게 날아오는 장면에서는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연출된 영화를 보면서도 희로애락을 느낀다는 것은 마음이란 실재가 아니라 보이고 들려오는 것에 기반되어 나타난 허상임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만일 마음이 실재하는 무엇이라면 이미 거짓임을 알기 때문에 맞은 편 기차가 지나쳐도 뒤로 달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눈을 감지 않으면 기차가 긴 만큼 뒤로 달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가에서는 진공묘유 무생법인(眞空妙有 無生法忍)이라고 합니다. 즉 텅빈 진공에는 묘한 것(앎)이 있으므로 인간은 본래 태어난 바 없으며 강물에 달이 비치듯 법의 도장이 찍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각이 흘러다니면 진공이 되지 못하지만 우리에게는 마음 이외에는 따로 믿을 것이 없기에 허망한 마음을 위주로 살다 보니, 주변 여건이 힘든 상황이면 도무지 헤쳐 나갈 수 없는 상실감과 무력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한 마음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마음이 생겨난 바탕이 존재함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자리는 본래 움직임이 없는 부동이며, 따라서 굳건한 바위처럼 바람에 흔들림 없는 삶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란 본래 있는 바가 아니므로 마음 하나 돌이키면 지옥과 극락이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모든 것의 주범인 줄 알아차린 인간은 마음과 싸우고 투쟁하면서 참마음을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마음의 바탕인 본성과 떨어진 적 없는데도 마음의 손바닥에 희롱당한 채 살았기에 마음으로 마음을 항복받고자 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마음을 강화시키기만 할 뿐 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마음과 싸우지 않는 것이 마음의 필요가 없어지므로 마음을 항복받는 최상의 길인지도 모릅니다.
깨달음에 관한 무수한 책과 설명이 난무하지만 과연 그로 인해 우리가 도움을 얻을 수 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이론으로 인한 이해는 결국 마음의 테두리에서만 움직이는 때문입니다.
우리는 음식을 먹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으며 촉감을 느끼면 가장 먼저 움직이는 것이 참나인 본성입니다. 마음의 뿌리를 제거하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지만, 마음이란 사물을 반연하여 생겨난 그림자와 같은 허상이라면 뿌리가 어디 있으며, 또한 어떻게 해야 마음의 뿌리를 제거하는지 알지 못하면 공허한 논리일 뿐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들 육신에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곧 본성입니다. 그렇기에 머리를 손으로 만지면 손도 알고 머리도 아는 것입니다.
만일 마음이 주체가 되어 안다면 마음이 머리로 가면 손은 몰라야 하고, 마음이 손으로 가면 머리는 몰라야 하지만 즉각적으로 양쪽에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마음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본성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본성이 육신을 떠나면 그 즉시 부패 되는 고깃덩어리일 뿐이며 육신으로 일군 마음도 흔적없이 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요한 곳에 단정히 앉아 본래 앎이 온 세상에 두루하여 일체 모든 것을 생겨나게 한 것이니, 만상은 모두 본체가 같아 평등한 것임을 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래 앎을 회복하는 모든 수행이란 실제로는 둘이 있는 게 아니지만, 방편과 단계는 그 수가 한없이 많은 것입니다. 그중에서 수행의 종류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면 삼마지, 삼마발제, 선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의 삼마지란 삼매로써 산만한 마음을 가라앉혀 고요하고 적멸한 상태를 이루는 것입니다. 마치 흐린 물을 고요하게 두면 흙 앙금이 가라앉아 맑은 물이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망념이 맑아진 까닭에 본래 앎만이 실재하며 허공꽃처럼 생겨난
만상에 마음이 번거롭게 요동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로부터 고요한 지혜가 생겨나 번뇌가 영원히 소멸하므로 내면의 적멸함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것이 마음을 고요하게 집중함으로서 산만함을 멈추는 삼매를 얻는 수행에 해당될 것입니다.
두 번째 삼마발제의 수행이란 몸과 마음이 모두 실재하는 바가 없는 허공꽃과 같은 데도 본래 앎을 좇아 허망하게 생겨난 것임을 깨닫고, 변화하는 것은 모두 온갖 환의 무리임을 관하는 것입니다.
환으로써 천태만상이 일어났음을 아는 까닭에 눈을 눌러 곁엣달이 나타난 것을 가리켜 있음도 아니고 그렇다고 없음도 아니므로, 있음과 없음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몸과 마음이 가볍고 평안함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 닦는 길로 들어선 사람은 세상이 환법인 줄 아는 까닭에 무아도 아니고 유아도 아닌 수행을 일으켜, 있음과 없음의 양변을 멀리 떠나는 그것이, 생사의 꿈속을 벗어난 열반임을 알아 점차 증진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의 선나의 수행이란 환인 것을 관하는 그것은 환과 같지 않으나, 환과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바도 모두가 환인 까닭에 환의 모습을 영원히 여의게 됩니다.
즉 환인 것을 관찰함은 지켜보는 본래 앎의 성품이므로 환과 같지 않은 까닭이며, 환과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있고 없음과, 같고 다름을 구분하여 생각의 모양을 짓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 전부가 환인 까닭입니다.
이와 같이 수행함으로써 환의 모습을 영원히 여의게 되는 것이며, 마치 맑은 물과 흐린 물이 따로 있는 것 아니며 흐린 물을 고요히 두면 흙 앙금이 가라앉아 맑은 물이 나타날 때, 흙 앙금을 버리면 아무리 흔들어도 맑은 물은 더 이상 흐려지질 않습니다.
이처럼 흙 앙금을 버리는 것이 마음을 끝없이 내려놓는 것이며, 내려놓았다는 생각까지 내려놓으면서 더 내려놓을 것이 없는 지경까지 이르면, 더 이상 좋고 나쁜 경계를 따라 흔들리는 마음이 나타나지 않는 경계가 마음을 쉰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앎이 주인공인 본성의 존재임을 알면 허망하게 생겨난 마음에 의한 허깨비 장난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그것을 인간의 궁극적인 완성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과거생에서도 지금과 똑같이 나를 주장하며 살았지만 흔적도 없으며 미래생에서도 마찬가지로 현생에서 그토록 주장하던 나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잠시도 허공을 숨 쉬지 못하면 즉시 허공으로 돌아가는 허망한 육신을 움켜쥐고, 그런데도 무엇을 그토록 붙잡으려 하고 인정받고자 애쓰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며…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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