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학 2024.상반기호한국문학과 호모 루덴스
한국문학사 편집부한국문학과 호모 루덴스
2016년 서울 광화문의 한 호텔에서 인류역사상 보기 드문 희한한 대결이 있었다. 이름하여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Deepmind Challenge match)’다. 한국의 천재 바둑기사 이세돌과 구글의 인공지능 AI가 바둑 대결을 펼쳤다. 결과는 1승 4패, 처음 한 판을 제외하고는 이세돌이 처절한 패배를 했다. 이후 인간은 바둑에서는 인간이 인공지능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처음에는 자존심 때문에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채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인간은 바둑에서 인공지능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또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챗GPT와 같은 새로운 인공지능이 나타나, 거의 모든 지적인 영역에서 AI는 인간을 대체하고 있다. 심지어 인공지능은 시도 짓고 소설도 만들어낸다.
인구가 줄고 노동시간이 줄고 그에 맞춤하여 인공지능과 로봇산업이 활성화된다. 뭔가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인류는 끊임없이 변신하여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나간다. 요즘에 딱 적합한 인간이 바로 호모 루덴스(Homo Ludens)다. 네덜란드의 철학자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1945)가 쓴 저서 『호모 루덴스』(1938)에서 시작한 이 용어는 노는 인간, 유희적 인간으로 번역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시작을 위해서는 호모 사피엔스가, 본격적인 자본주의 시대에는 호모 파베르가 강조되었다면, 인공지능이 활약하는 포스트산업사회에서는 인간 본성으로 호모 루덴스가 매우 중요해진다.
호모 루덴스를 추구하는 『한국문학』은 이번 호도 잘 논다. 특집 좌담은 어린 왕자의 바오밥나무를 찾아 지난 봄 마다카스카르를 다녀온 시인 박남준과 동행한 박봉남 다큐 감독의 대담을 마련했다. 소설가 조용호가 좌담의 맥을 짚으며 기록했다. 한국의 여러 문학 잡지에서 수많은 종류의 대담을 기획하였지만, 이처럼 무이론적이고 몰이론적이면서 동화같이 노는 이야기를 특집으로 다룬 적은 없었다. 이번 특집 좌담이야말로 호모 루덴스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세 분에게 감사드린다.
신작시 특집의 주인공은 홍신선 시인이다. 홍시인은 다섯 편의 시를 통해 오랜 관록으로 혼자 노는 행위의 절정을 보여준다. 이를 평론한 이숭원 교수의 평문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작심하고 쓴 글이다. 시와 평문이 함께 놀 때 문학은 즐거워진다.
시를 주신 강성은, 박규현, 정동철, 주민현, 허연 시인에게, 소설을 주신 공현진, 진연주, 표명희 작가에게 감사드린다. 잡지의 주인공은 뭐니뭐니 해도 역시 신작 시와 신작 소설이다.
‘비평의 눈’에서 소설평을 한 이병국 평론가는 이서수의 『젊은 근희의 행진』, 한정현의 『쿄코와 쿄지』, 최진영의 『단 한 사람』을 평하고 있다. 김수이 평론가는 시평에서 주민현의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 김소연의 『촉진하는 밤』, 김사이의 『가난은 유지되어야 한다』를 평한다. 한국문학의 최전선에서 고생한 두 분께 감사드린다.
‘지금 우리 문화는’에서 윤중강 선생은 우리 국악 성악을 조리있게 논평하셨고, ‘작가가 만난 최고의 고전’에서는 이근화 시인이 황진이와 김경후와 이백의 달로 재미있게 ‘썰’을 푸셨다. ‘작가방에 머무는 상상력의 편린들’에서 이현승 시인은 잘 놀고 즐거워하기 위한 전제조건에 대해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의 입장을 피력했다. ‘대학생창작교실’에서 작품을 뽑고 평을 해주신 동아대학교의 함정임 교수, 서울예술대학교의 이원 교수에게 감사드린다.
여러 필자분 덕으로 우리 독자들은 한바탕 잘 놀게 되었다.
2016년 서울 광화문의 한 호텔에서 인류역사상 보기 드문 희한한 대결이 있었다. 이름하여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Deepmind Challenge match)’다. 한국의 천재 바둑기사 이세돌과 구글의 인공지능 AI가 바둑 대결을 펼쳤다. 결과는 1승 4패, 처음 한 판을 제외하고는 이세돌이 처절한 패배를 했다. 이후 인간은 바둑에서는 인간이 인공지능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처음에는 자존심 때문에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채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인간은 바둑에서 인공지능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또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챗GPT와 같은 새로운 인공지능이 나타나, 거의 모든 지적인 영역에서 AI는 인간을 대체하고 있다. 심지어 인공지능은 시도 짓고 소설도 만들어낸다.
인구가 줄고 노동시간이 줄고 그에 맞춤하여 인공지능과 로봇산업이 활성화된다. 뭔가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인류는 끊임없이 변신하여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나간다. 요즘에 딱 적합한 인간이 바로 호모 루덴스(Homo Ludens)다. 네덜란드의 철학자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1945)가 쓴 저서 『호모 루덴스』(1938)에서 시작한 이 용어는 노는 인간, 유희적 인간으로 번역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시작을 위해서는 호모 사피엔스가, 본격적인 자본주의 시대에는 호모 파베르가 강조되었다면, 인공지능이 활약하는 포스트산업사회에서는 인간 본성으로 호모 루덴스가 매우 중요해진다.
호모 루덴스를 추구하는 『한국문학』은 이번 호도 잘 논다. 특집 좌담은 어린 왕자의 바오밥나무를 찾아 지난 봄 마다카스카르를 다녀온 시인 박남준과 동행한 박봉남 다큐 감독의 대담을 마련했다. 소설가 조용호가 좌담의 맥을 짚으며 기록했다. 한국의 여러 문학 잡지에서 수많은 종류의 대담을 기획하였지만, 이처럼 무이론적이고 몰이론적이면서 동화같이 노는 이야기를 특집으로 다룬 적은 없었다. 이번 특집 좌담이야말로 호모 루덴스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세 분에게 감사드린다.
신작시 특집의 주인공은 홍신선 시인이다. 홍시인은 다섯 편의 시를 통해 오랜 관록으로 혼자 노는 행위의 절정을 보여준다. 이를 평론한 이숭원 교수의 평문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작심하고 쓴 글이다. 시와 평문이 함께 놀 때 문학은 즐거워진다.
시를 주신 강성은, 박규현, 정동철, 주민현, 허연 시인에게, 소설을 주신 공현진, 진연주, 표명희 작가에게 감사드린다. 잡지의 주인공은 뭐니뭐니 해도 역시 신작 시와 신작 소설이다.
‘비평의 눈’에서 소설평을 한 이병국 평론가는 이서수의 『젊은 근희의 행진』, 한정현의 『쿄코와 쿄지』, 최진영의 『단 한 사람』을 평하고 있다. 김수이 평론가는 시평에서 주민현의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 김소연의 『촉진하는 밤』, 김사이의 『가난은 유지되어야 한다』를 평한다. 한국문학의 최전선에서 고생한 두 분께 감사드린다.
‘지금 우리 문화는’에서 윤중강 선생은 우리 국악 성악을 조리있게 논평하셨고, ‘작가가 만난 최고의 고전’에서는 이근화 시인이 황진이와 김경후와 이백의 달로 재미있게 ‘썰’을 푸셨다. ‘작가방에 머무는 상상력의 편린들’에서 이현승 시인은 잘 놀고 즐거워하기 위한 전제조건에 대해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의 입장을 피력했다. ‘대학생창작교실’에서 작품을 뽑고 평을 해주신 동아대학교의 함정임 교수, 서울예술대학교의 이원 교수에게 감사드린다.
여러 필자분 덕으로 우리 독자들은 한바탕 잘 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