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학, 2021년 하반기호(반년간호)
하응백 외‘한국문학’이라는 예방약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모르는 게 약이다.” 알아가는 과정에서 세상은 엄청난 혼란을 겪었다. 알고 나니 허무하기도 했다. 편하게 숨쉬기조차 힘들어졌다. 코로나19 이야기다. 인류 역사상 가장 수다스럽게 인류는 이 전대미문의 혼란을 서서히 극복해가고 있다.
자업자득이란 말도 있다. 일부의 인류학자들은 인류가 수렵과 채집에 기대어 살았을 때는 이런 감염병에 시달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인류가 농사를 짓고 목축을 시작하면서 가금류로부터 기인하는 질병에 노출되기 훨씬 쉬워졌다. 노동시간은 턱없이 길어졌고, 수렵 시기부터 인간의 DNA에 각인되기 시작했을 이동의 욕망도 자제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삶의 질은 형편없어졌다.
다른 시각으로 코로나19를 볼 수도 있다. 코로나19는 인간의 빠른 이동 속도로 인해 급속도로 확산된 질병이다. 인간이 시속 4km의 속도로 하루 8시간 걷는다면 32km 정도 갈 수 있다. 46,250km인 지구를 한 바퀴 돌려면 1,445일, 약 4년이 걸린다. 인간이 걷는 속도로 질병을 다른 인간에게 감염시킨다면 지구 한쪽의 질병이 지구 반대쪽까지 도달하는 데 최소 4년은 걸린다는 뜻이다. 말을 타면 두 배 정도 빨라진다. 하루 평균 65km 정도니 2년이 걸린다. 배를 타면 좀 더 빨라진다. 콜럼버스는 1492년 8월 3일 스페인의 팔로스를 출발해 10월 21일 바하마의 한 섬에 도착했다. 6,700km를 79일에 돌파했다. 하루 85km를 간 셈이다. 기차를 이용하면서 인간은 더욱 빨리 이동했다. 초창기 기차는 시속 20km 정도로 달렸다. 평지에서 자전거 정도의 속도였지만, 24시간 내내 달려서 하루 500km를 갈 수 있었다. 요즘 고속열차는 시간당 300km의 속도로 달리고, 여객용 비행기는 시속 900km의 속도를 낸다. 이틀이면 지구를 한 바퀴 돈다. 코로나19는 바로 이 비행기의 속도로 전 지구에 순식간에 퍼졌다.
어떤 말을 해도 돌이킬 수 없다. 인류는 다른 길로 갈 수 있었음에도 막다른 길로 갔고, 그 선택 역시 이제 전 지구적이다. 국제화, 세계화라는 말을 넘어 요즘은 전 지구적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모든 것이 전 지구적이 되어 버렸다. 그걸 실감나게 한 것 역시 코로나19다.
알게 모르게 이번 호에 실린 시와 소설은 코로나19와 관련이 있다. 김경욱, 이혜경, 정소현, 조해진 네 분 작가의 소설은 직, 간접적으로 코로나19에 직면한 인간의 심리적 대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의학이라면 처방으로 나가겠지만, 문학이라 심리적 대처에 머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대처는 광범위해서 만병통치약일 수도 있다.
이번 호에도 고인환 교수의 소설평과 이병철 시인의 시평을 게재한다. 문예지는 비평적 기능을 포기하지 않아야 하며, 시기적으로도 순발력을 발휘하여 따끈따끈한 현장을 포착해야 한다. 고인환 교수는 가족이라는 키워드로 정지아, 조해진, 이혜경, 신경숙의 소설을 분석 했다. 이병철 시인은 이산하, 강해림, 서윤후, 홍일표 시인의 시집을 읽고 관류하는 의미를 포착해냈다. 더불어 한 100권의 시집을 읽은 것처럼 보인다.
?이번 호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신작시 특집’이다. 황동규 시인을 모셨다. 황 시인의 신작시 5편은 모두 황동규 시인의 표현처럼 ‘환하다’. 게다가 시의 창작 동기나 과정을 밝히는 상당히 긴 분량의 산문은 더욱 ‘환하다’. 산문에는 ‘우연’에 대한 황 시인의 재미있는 생각이 담겨 흥미롭다. ‘우연’이 없다면 세상의 재미는 90퍼센트쯤 줄어들 수 있다는 황 시인의 말을 수긍한다. 아프리카의 사바나 지역을 헤매다가 배가 고파 죽을 때쯤 우연히 만난 사냥감이 없었다면 인류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루시’ 옆에 있었던 한 남자 인간에게 잡힌 새 한 마리가 인류를 우연히 구원했을지도 모른다.
황 시인의 시와 산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문학평론가 김수이 교수가 품격 있는 해설을 썼다. 김수이 교수는 황동규 시의 전체적인 이해 속에서 이번 신작시와 산문의 특징을 투과해냈다.
강정, 김병호, 김혜순, 이현승, 조말선 다섯 분의 신작 시도 반짝반짝 빛난다. 작가방을 열어 보인 이영주 시인, ‘중용을 찾아’ 떠난 장재선 시인, 마음풍경을 보여준 김유진 작가, 오정희의 『유년의 뜰』을 염탐한 김상혁 작가의 글도 참신한 읽을거리다. ‘대학생 창작교실’은 한양대학교 편이다. 유성호 교수와 신성환 교수가 수고해주셨다.
죽음보다 무서운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다. 정작 죽음은 무섭지 않다. 코로나19도 그렇다. 코로나19는 인류가 겪었던 다른 질병에 비하면 치사율도 그렇게 높지 않다. 하루하루 확진자 숫자와 지역별 숫자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제시된다. 이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런 숫자에 눈감고 문학작품을 읽고 있으면 또는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 공포는 지나가게 마련이다. 다른 질병도 마찬가지다. 병에 걸리면 병원에 가면 된다. 두려워 말고 ‘한국 문학’이란 예방약을 드시기 바란다. 그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현명한 방법이다. 도착지가 멀지 않았다.
(ISSN 2765-3331)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모르는 게 약이다.” 알아가는 과정에서 세상은 엄청난 혼란을 겪었다. 알고 나니 허무하기도 했다. 편하게 숨쉬기조차 힘들어졌다. 코로나19 이야기다. 인류 역사상 가장 수다스럽게 인류는 이 전대미문의 혼란을 서서히 극복해가고 있다.
자업자득이란 말도 있다. 일부의 인류학자들은 인류가 수렵과 채집에 기대어 살았을 때는 이런 감염병에 시달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인류가 농사를 짓고 목축을 시작하면서 가금류로부터 기인하는 질병에 노출되기 훨씬 쉬워졌다. 노동시간은 턱없이 길어졌고, 수렵 시기부터 인간의 DNA에 각인되기 시작했을 이동의 욕망도 자제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삶의 질은 형편없어졌다.
다른 시각으로 코로나19를 볼 수도 있다. 코로나19는 인간의 빠른 이동 속도로 인해 급속도로 확산된 질병이다. 인간이 시속 4km의 속도로 하루 8시간 걷는다면 32km 정도 갈 수 있다. 46,250km인 지구를 한 바퀴 돌려면 1,445일, 약 4년이 걸린다. 인간이 걷는 속도로 질병을 다른 인간에게 감염시킨다면 지구 한쪽의 질병이 지구 반대쪽까지 도달하는 데 최소 4년은 걸린다는 뜻이다. 말을 타면 두 배 정도 빨라진다. 하루 평균 65km 정도니 2년이 걸린다. 배를 타면 좀 더 빨라진다. 콜럼버스는 1492년 8월 3일 스페인의 팔로스를 출발해 10월 21일 바하마의 한 섬에 도착했다. 6,700km를 79일에 돌파했다. 하루 85km를 간 셈이다. 기차를 이용하면서 인간은 더욱 빨리 이동했다. 초창기 기차는 시속 20km 정도로 달렸다. 평지에서 자전거 정도의 속도였지만, 24시간 내내 달려서 하루 500km를 갈 수 있었다. 요즘 고속열차는 시간당 300km의 속도로 달리고, 여객용 비행기는 시속 900km의 속도를 낸다. 이틀이면 지구를 한 바퀴 돈다. 코로나19는 바로 이 비행기의 속도로 전 지구에 순식간에 퍼졌다.
어떤 말을 해도 돌이킬 수 없다. 인류는 다른 길로 갈 수 있었음에도 막다른 길로 갔고, 그 선택 역시 이제 전 지구적이다. 국제화, 세계화라는 말을 넘어 요즘은 전 지구적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모든 것이 전 지구적이 되어 버렸다. 그걸 실감나게 한 것 역시 코로나19다.
알게 모르게 이번 호에 실린 시와 소설은 코로나19와 관련이 있다. 김경욱, 이혜경, 정소현, 조해진 네 분 작가의 소설은 직, 간접적으로 코로나19에 직면한 인간의 심리적 대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의학이라면 처방으로 나가겠지만, 문학이라 심리적 대처에 머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대처는 광범위해서 만병통치약일 수도 있다.
이번 호에도 고인환 교수의 소설평과 이병철 시인의 시평을 게재한다. 문예지는 비평적 기능을 포기하지 않아야 하며, 시기적으로도 순발력을 발휘하여 따끈따끈한 현장을 포착해야 한다. 고인환 교수는 가족이라는 키워드로 정지아, 조해진, 이혜경, 신경숙의 소설을 분석 했다. 이병철 시인은 이산하, 강해림, 서윤후, 홍일표 시인의 시집을 읽고 관류하는 의미를 포착해냈다. 더불어 한 100권의 시집을 읽은 것처럼 보인다.
?이번 호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신작시 특집’이다. 황동규 시인을 모셨다. 황 시인의 신작시 5편은 모두 황동규 시인의 표현처럼 ‘환하다’. 게다가 시의 창작 동기나 과정을 밝히는 상당히 긴 분량의 산문은 더욱 ‘환하다’. 산문에는 ‘우연’에 대한 황 시인의 재미있는 생각이 담겨 흥미롭다. ‘우연’이 없다면 세상의 재미는 90퍼센트쯤 줄어들 수 있다는 황 시인의 말을 수긍한다. 아프리카의 사바나 지역을 헤매다가 배가 고파 죽을 때쯤 우연히 만난 사냥감이 없었다면 인류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루시’ 옆에 있었던 한 남자 인간에게 잡힌 새 한 마리가 인류를 우연히 구원했을지도 모른다.
황 시인의 시와 산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문학평론가 김수이 교수가 품격 있는 해설을 썼다. 김수이 교수는 황동규 시의 전체적인 이해 속에서 이번 신작시와 산문의 특징을 투과해냈다.
강정, 김병호, 김혜순, 이현승, 조말선 다섯 분의 신작 시도 반짝반짝 빛난다. 작가방을 열어 보인 이영주 시인, ‘중용을 찾아’ 떠난 장재선 시인, 마음풍경을 보여준 김유진 작가, 오정희의 『유년의 뜰』을 염탐한 김상혁 작가의 글도 참신한 읽을거리다. ‘대학생 창작교실’은 한양대학교 편이다. 유성호 교수와 신성환 교수가 수고해주셨다.
죽음보다 무서운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다. 정작 죽음은 무섭지 않다. 코로나19도 그렇다. 코로나19는 인류가 겪었던 다른 질병에 비하면 치사율도 그렇게 높지 않다. 하루하루 확진자 숫자와 지역별 숫자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제시된다. 이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런 숫자에 눈감고 문학작품을 읽고 있으면 또는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 공포는 지나가게 마련이다. 다른 질병도 마찬가지다. 병에 걸리면 병원에 가면 된다. 두려워 말고 ‘한국 문학’이란 예방약을 드시기 바란다. 그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현명한 방법이다. 도착지가 멀지 않았다.
(ISSN 2765-3331)
주제 분류